[박영미 칼럼] 삶의 스케치, 사랑을 닮은 36년의 풍경

머리칼 한 올에도 묻어나는 시간

빅토르 푸르베, <가족>, 19세기경, 오르세미술관

[칼럼위원] 아르티움연구소 박영미소장 / 햇살이 부서지는 거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남편이 말했다. “가정불화 때문에 30대 아들이 70대 아버지를 살해했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부간의 소통과 공감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런 단절이 결국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잖아요.”

한숨과 함께 시선을 돌린 곳은 식탁 위의 명화집. 나는 남편에게 빅토르 프루베의 <가족>이라는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보, 이 그림 속 남편 얼굴이 당신 젊을 적 모습과 참 닮았어요.” 그림 속 남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내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 안고 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은 아기와 뽀뽀하는 남편을 향해 행복한 눈빛을 보내는 듯하다. 아기의 웃음은 순수한 행복을 전한다. 남편의 투박한 손, 부부의 소박한 옷차림. 우리 부부는 오래전 단칸방에서 두 아이를 키우던 시절을 떠올렸다.

“여보, 이발 좀 해줘요.” 남편의 부탁에 나는 낡은 꽃무늬 앞치마를 둘렀다. 빗과 전기바리깡을 바삐 움직이며 머리를 다듬는 동안, 거실에는 단순하고 깊이 있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선율이 흘러나왔다. 음악은 우리 삶의 시간을 관통하며 과거와 현재를 부드럽게 이어줬다.

가위질에 의해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또렷한 옆모습의 청년이었던 남편의 얼굴에는 적당히 마모된 세월의 흔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굳세고 날카롭던 청년은 이제 가장 친근하고 믿음직한 동반자로 내 앞에 앉아 있다. 그가 말했다. “머리에 각질이 생기니 미용실 가는 것이 꺼려져.” 남편의 얇아진 머리카락 속의 드러난 맨살, 시간의 무늬들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멈칫했다. 흐릿해진 시야, 시큰한 코끝. 36년의 시간이 파편처럼 스쳐 지나가더니 어느새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왔다. 경제적으로 힘겨웠던 날들, 부부간 끝없이 이어지던 대화, 그리고 그 모든 시련 속에서 지켜낸 사랑.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보듬으며 36년을 엮어왔다.

“어때요, 오늘 내 솜씨?” 내가 묻자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완벽해요. 당신이 이발해 주는 모습이 바로 그림이고, 명화지.” 남편의 솔직한 칭찬에 나도 활짝 웃었다. 거울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삶과 사랑을 닮은 진짜 걸작이었다.

부부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집에 사는 관계를 넘어선다. 소통과 공감이 없다면 쉽게 단절되고, 고립의 끝은 비극이 된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는 손길, 진심 어린 대화는 삶을 다시 이어 붙인다. 우리의 삶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매 순간 서로를 조율하며 그려낸 풍경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명화가 될 테니까.

삶은 때로 불완전한 스케치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랑과 시간이 묻어나면, 우리는 그 어떤 예술작품도 흉내 낼 수 없는 걸작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끝까지 함께 손을 맞잡은 사람들과 만들어 가는 것이다.
36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칼럼위원 아르티움연구소 박영미  소장은 부모교육과 감정코칭 전문가로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고 있다. 일상과 예술에 대한 인문학 강의도 한다.

주요 강의 주제 :

  - 일상의 채색

  - 일상의 소소한 연주

  - 일상의 소소한 사유

  - 소소함이 특별해지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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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