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미 칼럼] 설날, 아버지의 노래

- 변화 속에서도 지키는 설날 -

얀 스텐 Jan Steen, <즐거운 가족 The Happy Family>, 1668.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 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다리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어린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이 아버지를 위해 불렀던 노래다.

설날이 다가올수록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 생전에 아버지는 가정적이거나 다정한 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올해는 설을 앞두고 아버지가 유난히 그립다. 어머니가 몇 개월 전에 세상을 떠나서일까? 아니면 나 또한 이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찾아갈 친정집이 없다는 생각에 솟구쳐 오르는 그리움과 허전함 때문일까?

아버지가 좋아했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가 절로 입 밖으로 나온다. 술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설 2~3일 전부터 폭음을 하시고 설 당일에는 취한 채로 종일 누워 계셨다. 어릴 적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속상하고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돌아갈 고향과 찾아볼 부모, 형제, 친척 하나 없는 당신의 처지가 감당하기 힘드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이해할 나이가 되니 아버지는 우리 가족 곁에 없다.

아버지는 평안도가 고향이다. 1945년 해방되던 해, 학업을 위해 서울에 혼자 남은 청소년이었던 아버지. ‘곧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 그러나 갈 수 없는 그곳이 그리울 때면 술을 마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매는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시작으로 가고파, 아 목동아, 바위고개,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 두 시간 넘게 부를 만큼 어지간한 가곡은 섭렵하였다. 그것은 악보도 악기도 없는 어머니로부터의 무르팍 음악 교육의 덕이었다. 어머니로부터 가곡을 배우고, 술을 드신 아버지 앞에서 공연을 펼친 셈이다.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이 가사에서는 꼭 눈물을 보이시던 아버지. 몇 년간 호흡을 맞춰 온 우리 자매는 아버지가 감동하는 부분을 잘 알기에 그 부분에서는 몰입하여 더욱 애잔하고 감동적으로 불렀다.

아버지가 그리워했던 고향은 ‘평안도’라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었을 것이다.
더는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이 있는, 아버지의 기억과 상상 속에 있는 심정적인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의 상상 속에 화가 얀 스텐의 <즐거운 가족>의 모습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식탁 위의 빵조각,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그릇과 물병들을 보니 잘 차려진 식탁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은 개의치 않고 음악을 연주하고 먹고 마시는 이 시간이 마냥 즐거운 모습이다. 소박하지만 풍성한 삶이다. 아버지가 꿈꿨던 고향집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애달픔과 그리움의 한쪽에는 이러한 모습도 있었으리라!

결혼 후, 나의 명절 모습은 달라졌다. 시댁에서 30여 명의 친척들이 모여 차례를 지낸 후, 세배하며 덕담을 나누고 나면 세뱃돈을 계산하며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모습이 큰 웃음을 주었었다. 작년까지는 설을 앞두고 몸과 마음이 바빴지만 친척을 만난다는 설렘이 있었다.

올해는 다르다. 나름대로 유지되던 전통적인 설의 모습이 종부의 죽음과 각자의 사정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쓸쓸함이 스멀거리면서 달라진 세태에 맞춰가야 할 상황이 된 것이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한 해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비록 올해부터 모이지 못하더라도, 안부를 전하고,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 한다.

그리고 다시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칼럼위원 아르티움연구소 박영미 소장은 부모교육과 감정코칭 전문가로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고 있다. 일상과 예술에 대한 인문학 강의도 한다.

주요 강의 주제 :
- 일상의 채색
- 일상의 소소한 연주
- 일상의 소소한 사유
- 소소함이 특별해지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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