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들리는 것만 듣지 말고 -
조지 프레데릭 왓츠, <희망 Hope>, 1886. 테이트 브리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며 웃음꽃이 피어나고 수다의 열기가 높아질 때였다. 갑자기 고성과 험한 말들이 오가고 가구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의견 차이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다툼으로 비화된 것이었다. 다툼의 발단이 된 TV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초미의 관심사를 집중 조명해 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다툼의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서둘러 친구들과 헤어진 후, 편치 않은 마음으로 귀가하는 길에 문득 한 점의 그림이 떠올랐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며 소개했던 그림이다. 조지 프레데릭 왓츠의 <희망>.
왓츠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구 위에 앉은 희망은 눈이 가려진 채로 리라를 연주하고 있네. 리라의 모든 현이 끊어졌지만 단 하나만이 남아 가냘프고 작은 소리를 내고 있지. 그녀는 그 작은 소리를 온 힘을 다해 들으며 모든 음악을 가능하게 하려고 해. 이 생각이 마음에 드는가?”
나는 이 그림의 제목이 왜 ‘희망’인지 이해하기까지에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희망, 보이지 않는 것을 듣는 것!
한 여인이 둥근 구(球)에 앉아 있다. 구의 주변에 물이 차오르고 구는 물 위를 떠다니고 있다. 얇은 드레스가 젖어서인지 다리의 살갗이 간간이 비치고 있다. 눈은 하얀 천으로 동여매어져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다.
힘을 잔뜩 주어 악기를 꼭 붙들고 있는 왼손, 그리고 왼발로 오른쪽 종아리를 감아올려 떨어지지 않게 간신히 버티며 중심을 잡고 있는 위태로운 여인의 자세. 맨발로 절망을 밟고 밟아 먼 길을 걸어서 굳은살이 박이고 새까매진 왼쪽 발바닥.
쇠사슬에 묶여있는 악기에는 끊어진 줄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줄만 남아있다. 이 악기를 보듬고 무슨 음을 튕기며 무슨 곡을 연주하는 걸까? 고개를 푹 숙여 귀 기울여 듣는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보이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희망, 그녀의 손가락에서 빚어내는 음악은 분명 희망일 것이다.
헬렌 켈러는 말했다.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과의 단절이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과의 단절이다.”라고.
우리는 정말 듣고 있는 걸까?
볼 수 있으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들을 수 있으나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아닐까? 또 보고 들었다고 다 알고 다 설명이 되는 것일까?
희망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오직 내 목소리를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식당에서 일어난 싸움처럼.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이 충돌하는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가 마주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한 줄기 미세한 소리는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의미를 찾으려는 열린 마음이 우리가 희망을 발견하는 순간일 것이다.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 도입부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건반 하나로 빚어내는 희미한 종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진다. 이 종소리가 희망의 소리이기를 바란다.
갈등과 분노 속에서, 끊어진 줄 사이에서, 피아노 건반 한 음의 타건에서 들려오는 작은 희망의 소리를, 우리는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칼럼위원 아르티움연구소 박영미 소장은 예술칼럼니스트이고, 동화작가이며, 일상과 예술에 대한 인문학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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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