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충주향토사학자 우보 김희찬의 ‘충주 물길 따라’ 걷기, 마애불과 금천창 연구

탄금대 금휴포를 지나 쇠꼬지 여울 마애불과 창동 금천창을 보다

충주 창동 마애불

충주 물길따라가기 일정은 금휴포(탄금대)를 시작으로 금천창(창동), 누암선소(누암서원, 누암, 누암 산제당)를 거친 후, 중앙탑까지는 중계 트랙과 강가 산책로로 나눠 걷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중앙탑에서 안반내로 이동하며 여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하담나루, 가흥창, 포구에서 목계나루, 선소를 거쳐 막흐레기여울(여우섬), 복탄, 공유수탄(비내섬), 영죽리, 단암리를 통과하여 부론, 흥원창, 법천사지, 거돈사지 등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충주 물길 따라가기’ 행사를 위해 참여자들이 둘러볼 주요 지점들에 대해 사전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자료를 구성하기로 했다.  두 번째 자료는 창동 마애불과 금천창이다.

<창동의 "청금정" 강가 바위에 마애불이 조각돼 있다.>

탄금대를 감싸며 달천과 남한강이 만난다.
합수머리다. 달천다리를 건너면 갈마 마을이다. 오른쪽 창동 방향으로 길을 잡아 들어가면 왼쪽으로 솟은 봉우리가 쇠꼬지이다. 합수머리를 지난 강물은 쇠꼬지 쪽으로 쏠리며 흐른다. 그리고 여울을 만들었었다. 쇠꼬지를 휘감으며 굽이쳐 흐르던 여울을 "쇠꼬지여울"이라고 불렀다.
쇠꼬지는 이름처럼 예전에 철광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주에 있었던 역원 중에 "주 서쪽 10리에 금곶원"이 있다고 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쇠꼬지와 관련된 것이었을 것이다.

물길에서 여울은 어떤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며 지난다. 합수머리를 지나며 수량이 늘면서 동시에 여울이 시작된다. 쇠꼬지 벼랑 쪽으로 굽어 흐르던 쇠꼬지여울은 금휴포를 떠난 뱃사람들이 만나는 첫 위험이 되었을 것이다. 쇠꼬지여울을 지나면 중앙탑을 지나 달여울까지 거의 직선의 물길이 열린다. 쇠꼬지여울을 벗어난 지점, 지금 창동의 "청금정"이라고 부르는 곳의 강가 바위에는 마애불이 조각돼 있다.

입구에 세운 마애불 안내문은 이렇다.
“암벽의 넓적한 면에 새긴 불상은 마애불(磨崖佛)이라고 하는데 이 마애불은 높이 4m 정도로 남한강 변에서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크고 길게 표현된 눈꼬리는 근엄함을 보이면서도 툭 불거진 큼직한 코와 귀는 서민적인 친근감을 보여주는 충주지역의 토속적인 불상이다. 귀는 어깨에 닿아 있고 머리에 비해 양 어깨는 넓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눈은 일직선으로 표현하였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 앞에서 무릎 아래까지 겹겹이 흘러내린다. 수인은 전혀 표현되지 않았고 언뜻 보기에 상호부분 등이 채색되어 있는 듯하나 이는 바위에 있는 철 성분 때문으로 보인다.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얼굴 모습, 옷주름 표현, 연꽃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 수운의 안녕을 빌기 위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

마애불의 불교미술사적 설명은 차치하더라도 ①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는 전설과 ② 고려 시대 수운의 안녕을 빌기 위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는 대목이 눈에 든다.

신립장군의 자화상 설은 쇠꼬지여울 위의 달천 끝에서 1592년 6월 7일에 벌어진 조선군과 왜군의 전투였던 탄금대 전투에서 달천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은 그날의 슬픔을 담은 전설이다. 마음이 그럴 듯하지만, 그 전투가 남긴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창동 마애불에 그런 전설이 깃들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고려 시대 수운의 안녕을 빌기 위한 설은 창동에 있었던 금천창을 전제로 한 단편적인 해석이다.
수운과 관련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고려 시대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조선 시대에도 충주에 왕래하던 배가 여전히 있었으며, 수운을 이용한 물길 상황에서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던 대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의지할 대상으로 여전히 마애불이 경외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계단을 이용해 구경할 수 있지만, 온전한 모습과 기능은 물길에서 배나 뗏목을 타고 볼 때에 가능할 것이다. 또는 지금의 찻길이 아닌 쇠꼬지여울과 나란히 강가에 나있던 벼랑길 상황에서 상상해 보면, 길 앞에 우뚝 서 있는 마애불은 더욱 위엄스럽고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창동 마애불을 보고 나와 만나는 마을이 금천창이 있던 창동이다.>

창동은 옛날에 금천창(金川倉)이 있었던 마을이다.
중앙탑면(中央塔面)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에 부르던 가금면(可金面)은 충주가 38면으로 구성되어 있던 시기에 가흥면(可興面)과 금천면(金川面)으로 존재했던 것을 1914년에 일제가 강행한 <지방구역명칭변경>에 의해 두 면을 합치며 한 글자씩 따서 붙인 이름이다. 금천면은 금천창에서 유래되었고, 그 중심 마을이 지금의 창동(倉洞)이다.

1465년(세조 11)에 금천창을 가흥으로 옮기는 조치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 세곡(稅穀)의 집하와 운송의 중심이 가흥창이었지만, 금천창은 보조적인 역할을 해왔다. 세곡창이 먼저 자리했던 금천은 살만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다음, 마을을 둘러 북편으로 흘러나가므로,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物貨)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통하여 민가(民家)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마을과 흡사하다. 배의 고물[艫]과 이물[艫]이 맞닿아서 하나의 큰 도회로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한가한 시골 마을이지만, 수운(水運)이 왕성할 때 물류 중심지 중의 한 곳이 창동이었다.

2002년에 ‘양진명소오룡굿’과 관련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동의 청명주 장인이었던 돌아가신 김영기 선생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창동에서 다섯 바가지 물을 떴다는 ‘양진명소오룡굿’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 선생 집에는 예전에 250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네 척이 있어서 서울을 왕래하며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남한강 수운이 실제로 이용되던 상황의 이야기였지만 보조댐이 건설된 후 탄금호로 불리는 호수 공간이 된 때라서 고개만 끄덕였던 일이 있었다.

청명주 양조장 앞 마당에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다. 나란히 세워놓은 설명문을 보면, 약사여래입상은 1977년에, 오층석탑은 1978년에 ‘인근의 폐광 또는 절터에 있던 것’을 지금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으로 설명한다. 석탑은 지금 자리에서 북쪽 100m 지점(설명에는 ‘1978년 남쪽으로 100m 지점인 이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으로 안내함.)이 원위치라고 하고, 여래입상은 ‘근처의 폐광에서 발견되어 1977년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원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위치의 서쪽 언덕이 옛 절터이므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얼핏 보면 같은 곳에서 옮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을 알 수 있다.

원위치는 다르더라도 석탑과 여래입상은 아담하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오층이라고 하지만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석탑과 함께 그 절반쯤 되는 여래입상은 젖살이 올라 통통한 볼을 가진 어린이처럼 앙증맞다. 둘 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옮겨온 지 45년이 지났지만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특히 오층석탑은 <천리충주>를 진행하면서 만났던 여러 석탑 중에 문경읍 갈평리 보건지소 마당에 있는 갈평리 오층석탑과 닮은꼴이어서 비교된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강쪽 음식점 옆에 눈에 띄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훤칠한 키에 지나갈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인데, 회화나무이다. 1982년에 면나무로 지정될 때 추정 수령이 310년이었으니, 지금은 350년이 넘었다. 은행나무와 함께 대표적인 학자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를 충주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시립도서관에 젊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고, 소일 시내버스 정류장 옆에 있던 것은 2012년에 태풍 볼라벤의 피해로 생을 마쳤다. ‘귀신 쫓는 나무’로도 불리는 회화나무! 창동에 있는 회화나무는 충주에서 가장 그럴듯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나무껍질 틈에 버섯도 아닌 것이 빼곡히 뿌리내리고 있다.


장암정호사당 전경


청명주, 오층석탑, 약사여래입상, 회화나무에 탱자나무까지 마당 하나를 중심으로 한눈에 보이는 아기자기한 곳이다. 그곳을 나와 30m쯤 가면 오른쪽의 두 집 사이에 묵직한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충주의 대표적 문신인 장암 정호(鄭浩, 1648~1736)를 모신 곳이다.


장암 정호는 병자호란을 피해 충주로 낙향한 정경연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충주의 노은 고개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의 현손이고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수암 권상하와 함께 동문수학하였다. 1684년(숙종 10) 정시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대쪽 같고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늘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로 인해 소론, 남인 등 다른 당파와 정치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어 여러 번 귀양을 가기도 했다. 
1718년(숙종 44)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725년(영조 1)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727년(영조 3)에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당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1730년(영조 6)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731년(영조 7)에야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후 연풍과 충주 지역에 거주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1736년(영조 12) 10월 13일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충주 누암리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737년(영조 13) 1월 8일 선산이 있는 지장리 화영산에 묻혔다.

장암 정호 사당은 본래 누암서원에 있었다.
사당 앞에 세운 안내문을 보면, ‘영월 정씨 후손들에 의해 누암서원 건물 중 북청 향현사를 현재의 위치에 옮겨져 장암 정호의 사당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하여 본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있던 건물 중의 하나이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지며 전국에 중복 배향된 서원의 대부분이 훼철되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중심으로 민정중(閔鼎重, 1628~1692)과 권상하(權尙夏, 1641~1721), 그리고 정호를 배향해오던 누암서원도 훼철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청 향현사’를 지금 위치로 옮겨 정호의 개인 사당으로 삼은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장암사(文嚴祠)라는 정호의 사당이 따로 있다.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에 있는 이 사당은 정호의 묘역 입구에 위치한다. 그곳에는 장암의 묘를 중심으로 위쪽에 정호의 할아버지인 정직(鄭淙, 1588~1677)의 묘가 있고, 아래에 정호의 아들인 정희하(鄭義河, 1681~1747)의 묘가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정호의 아버지 묘가 없다.

정호의 아버지인 정경연(鄭慶演, 1605~1667)의 묘는 충주시 금가면 문산리에 있다. 정경연은 충주에 세거한 영일 정씨 집안의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사정을 기록한 비석이 노은 고개 아래인 수룡리에 있어서 증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두고 한때 고민한 일이 있다.

정호의 호인 장암(丈庵)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연풍면 적석리 입석마을에는 반계정(磻溪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반계정을 지은 커다란 암반을 '장암'이라고 한다. 장암은 거기에서 유래된 호이다. 또한 반계정이 있는 그곳은 정호의 고조부인 송강 정철이 생전에 찾았던 은거지였다고 한다. 그것을 실현한 이가 정호였다.

현장을 찾아보고 확인하며 연결해 보니 따로 존재하던 각각의 의미가 연결되며 아귀가 맞아갔다. 그것이 결국 누암서원으로 모아졌고, 누암서원이 훼철된 후 건물 중의 하나였던 향현사를 옮긴 창동의 정호 사당이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는 실마리 중의 하나였다. 사당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찾아온 충주 지역의 변화와 그 중심인물 중의 하나였던 정호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호 사당 뒤는 그냥 언덕이었다.
그곳이 개발되어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아직 집을 짓지 않았다. 거기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며 창동 마을의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청금정도에 쓰다 [題聽琴亭圖]>

        노인은 세상일에 종사하기 견디지 못해
초가집 한 채 동회 골짜기에 지었네
      거문고와 책은 뒤집혀 좌우에 버려졌고
                  북창에 시원한 바람 부니 홀로 조용히 누웠네  
어디선가 온 박생이라는 미소년이   
   소매에서 용면의 그림 한 폭 가져왔네
      이곳이 누암에 있는 청금정이라 하는데
      정자는 월탄의 첫 번째 구비를 마주했네
상류의 형승은 대략 알고 있으니      
신라의 유적도 이목에 남아 있네      
손으로 우선의 백 자 누대 가리키니 
산 발치에 김생의 버려진 암자 있네 
 무엇보다 옛날 탄수가 살던 전원이니
  회옹의 강가 집에 비교하면 어떠한가
  백 이랑 논은 푸른 빛 드물지 않고       
   천 줄기 버들은 묶은 것처럼 빽빽하네   
           묻노니, 그대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위로는 늙은 형 섬기고 아울러 친족 거두네
처자는 손수 물 긷고 절구 찧으니       
        가난한 선비의 생애는 벼슬을 바라지 않네
            손님 맞아 낚시 드리우면 고기 제법 팔팔하고
닭 잡고 기장밥 지어 나물 섞으리라     
회옹이 기뻐하며 약속하는 말 있으니  
가을이 오면 도담, 구담, 옥순봉 찾아   
일엽편주 타고 차례로 청금정에 오르면
그림 속의 산천이 응당 빽빽하리라       
이에 술잔 들고 위쪽에 시를 쓰니         
          지는 노을과 외로운 따오기 저버릴 수 있으랴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지은 시이다.
‘청금정도(聽琴亭圖)’로 제목을 단 그림을 감상하고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국에 몇 개의 청금정이 있지만, 시에 표현된 여러 지명을 보면 탄금대와 그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이 있다면 그것을 보며 실감할 수 있겠지만, 그림이 없으니 시에 표현된 묘사를 통해 상상할 수밖에 없다.


정자를 그렸다는 월탄의 첫 구비는 탄금대를 지나며 휘도는 첫 구비인 쇠꼬지여울일 것이다.
신라의 유적은 중앙탑을 가리킨 것일 테고, 우선의 백자 누대가 곧 탄금대이다. 산 발치에 김생의 버려진 암자는 김생사(金生寺)를 말한 것이고, 탄수(灘水)가 살던 전원은 김생사와 탄금대 사이에 있었던 용탄(龍灘)을 말한다. 백이랑의 눈은 강 건너 금가면에 빼곡히 들어앉은 그것의 표현일 것이고, 천 줄기 버들은 강가에 심겼던 그것을 말한 것이다.


회옹(淮翁)으로 표현하며 그림으로 뛰어든 작자는 상상의 나래를 가을 풍경으로 옮겨 도담, 구담, 옥순봉에 뻗치며 일엽편주로 거슬러 오르내리던 뱃길로 연결하며 세상을 꽉 채우고 있다. 이 또한 상상해야 그릴 수 있는 풍광이다. 그만큼 이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을 계속 요구한다.

20241105 牛步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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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