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향토사학자 우보 김희찬의 ‘충주 물길 따라’ 걷기 금휴포 연구

탄금대 금휴포를 충주 물길 따라걷기 기점으로

탄금대와 물길


11월 16일, 토요일에 길 떠날 채비가 많다.

날씨가 걱정이다. 오늘 비 그치면 내일은 추워질 텐데. 자료집이 64쪽이고, 지적원이 이어붙인 게 여덟 벌이다. 거기다가 1910년 1915년에 측도된 1대 5만 지형도가 넉 장이다. 올해 진행한 <연원도 따라가기>의 마지막 일정인 <충주 물길 따라가기>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낸 것 같다. 사진은 현장에서 순서대로 찍을 텐데, 그것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오른쪽 어깨가 무진장 아프다. 글을 써야 되는데 어깨만 탓하고 있다.


이번의 일정은 금휴포(탄금대)를 시작으로 금천창(창동), 누암선소(누암서원, 누암, 누암 산제당)를 거친 후, 중앙탑까지는 중계 트랙과 강가 산책로로 나눠 걷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중앙탑에서 안반내로 이동하며 여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하담나루, 가흥창, 포구에서 목계나루, 선소를 거쳐 막흐레기여울(여우섬), 복탄, 공유수탄(비내섬), 영죽리, 단암리를 통과하여 어주 부론, 흥원창, 법천사지, 거돈사지 등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11월 16일에 예정된 ‘충주 물길 따라가기’ 행사를 위해 참여자들이 둘러볼 주요 지점들에 대해 사전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자료를 구성하기로 했다.


제일 첫 번째 자료는 탄금대 금휴포이다.


1. 탄금대 금휴포


탄금대는 익숙하지만 금휴포는 낯설다.

또한 탄금대는 익숙하지만 대문산(大門山) 또는 견문산(犬門山)이란 이름은 낯설다. 그만큼 우륵(于勒)과 관련해서 내려온 전설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탄금대는 ① 우륵의 전설이 깃든 곳, ② 양진명소(楊津溟所)가 있고, 그곳에 정기적인 제를 지내던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가 있던 곳, ③ 1592년 탄금대 전투로 슬픔이 물든 곳, ④ 충주의 관문 포구였던 금휴포가 있던 곳, ⑤ 충주를 찾았던 인사들이 가장 많은 시를 남긴 곳, ⑥ 20세기 후반에 충주에서 학교 다닌 이들이 가장 많이 소풍 갔던 곳, ⑦ 21세기에 들어서 국가 명승 제42호로 지정된 곳, ⑧ 충혼탑, 팔천고혼위령탑 등 충주의 아픔과 슬픔을 기리는 곳, ⑨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는 곳, ⑩ 충주문화원과 야외음악당이 자리한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 금휴포가 가지는 의미는 실체적인 기능에 비해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충주의 역대 지지류의 진포탄(津浦灘)조에 기록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그럼에도 금휴포의 흔적을 따라가 보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금휴포라는 물길과 관련된 포구가 있었고, 양진명소사라는 국행제 소사(작은 제사)로 한강의 대천제(큰강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 탄금대였다. 금휴포 바로 옆의 쌈지공원은 1686년에 세웠던 양진창(창고)이 위치했던 곳이다.


양진창은 군량미 저장소이다.

금휴포 옆에 1686년에 새로 세웠는데 1690년에 읍성 안으로 옮겨서 진창(鎭倉)으로 불리며 조선조 끝까지 존속했던 창고였다. 탄금대에 존재했던 기간이 미미하기 때문에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금휴포를 중심으로 배를 이용한 대량 운송이 가능했고, 임진왜란 이후에 탄금대를 서울 방어를 위한 주요 방어시설의 한 곳으로 인식하면서 취해진 조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금휴포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위상을 달리한다.

1912년에 시험 재배에 성공한 황색연초의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연초 수송을 위한 방법으로 이전부터 이용하던 수운을 택했었다. 충주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1913년 9월부터 3년간 진행된 <충주시구개정> 사업 기간 중에 부민약국삼거리로 불리는 곳부터 탄금대 장례식장이 있는 곳까지 신작로를 개설하여 황산연초를 용산 연초제조창까지 수운을 이용하여 운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상황을 반영한 1920년대의 사진이 <탄금대의 계선대(繫船臺)>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시대와 상황을 다르지만 충주 물길이 주요한 수단으로 이용되던 때에 금휴포의 중요성을 증명해 준다. 금휴포의 이용 상황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그곳을 이용한 이들이 남긴 몇몇 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종직의 충주에서 배편을 얻지 못했다 나 구봉령의 금휴포에 배 띄우고 , 송상기의 김진화를 위한 만시 등이 있다. 


금휴포는 충주의 관문 포구로 기능하였다.

세곡의 운송은 물론 서울로 오가는 이들이 배편을 이용하던 곳이었다. 남한강 수운 기능 중 서울에서 올라오는 배의 주요 선적품은 소금과 젓갈류였으며, 이를 통해 충주에 공급되던 소금이 들어오던 곳이었다. 일본인들이 주목했던 ‘소금, 명태, 석유 및 잡화 등’의 취급 물품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남한강 수운은 1928년 청안역에서 충주지역까지 연장 개통된 충북선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최근 탄금대 입구에서 발굴된 제철 유구는 4세기 중후반 한성백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된 덩이쇠는 이미 이 시기에 금휴포에서 배편으로 운송되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시대에는 그 이용이 더욱 활발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충북선의 연장 개통이 있기 전까지 주요 물품의 대량 운송 방법으로 수운이 이용되었는데, 바로 그 첫 관문이 금휴포였다.


따라서, 충주 물길 따라가기의 첫 장소로 탄금대 금휴포를 기점으로 삼는다.


(20241104 牛步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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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