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과 함께 충주를 걷다, 시와 역사, 그리고 길 위의 이야기
충주에는 권태응(1918~1951)의 동시 '감자꽃'을 새긴 비석이 네 기가 있다. 그리고 '재밌는 집 이름'을 새긴 비석까지 모두 다섯 기의 비석이 있다. 2024년 1월 24일에 <천리충주> 번개 모임으로 한 번 걸었었다. 그때 '재밌는 집 이름'을 새긴 비석을 찾지 못했었고, 뒤에 그것만 따로 갔던 일이 있다. 11월 16일에는 그 다섯 기의 비석을 따라서 권태응의 모교인 충주교현초등학교부터 탄금대까지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걸었다.
9시에 <충주문학ㄱㅗㅑㄴ>으로 이름표를 달고 있는 옛 시립도서관 앞에서 모였다. 나오는 길에 아이들을 만나서 함께 갔다. 시립도서관 경내에는 몇 기의 비석이 있다. 그중에 하나로 문학관 앞에 있는 네모진 검은 비석은 <우송 김태길 문학비>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거기부터 시작이다.
아이들이 김태길(1920~2009)을 모를뿐더러, 권태응과의 관계는 더욱 알지 못한다. 충주 사람도 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권태응에게 김태길은 고종 육촌 동생이고, 김태길에게 권태응은 외 육촌 형이 된다. 권태응은 여덟살까지 칠금동 권승지 댁에서 살았는데 그 시절 김태길도 외가인 이곳에서 같이 컸던 시절이 있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매일 아침 도서관 문이 열리고 문학관 북도에 설치된 신문을 교체한 사서가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문학관 안에는 권태응, 박재륜(1910~2001), 이상화(1936~1983) 시인의 흉상이 있고, 충주 출신의 문인 몇을 소개하고 있다. 올해 작고하신 신경림(1936~2024) 선생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 전혀 낯선 충주 문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충주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되돌게 했다.
문학관 전시물을 한바퀴 둘러보며, 끝자락에 꾸며진 강준희 선생 기증도서가 있는 곳에 들어갔다. 세 면을 꽉 채운 책 중에 시집을 분류해 놓은 곳에서 맨 꼭대기 칸에 꽂힌 <감자꽃>을 꺼냈다.(손대면 안되는데 슬쩍 꺼내봤다.) 첫 쪽에 실린 ‘땅감나무’를 아이들에 읽게했다. ‘땅감나무가 뭘까?’라고 물으니, 삽화를 보고는 ‘토마토요!’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뜨거웠던 7월에 나는 한 달 걸려서 그 책들을 정리했었는데, 정리하며 느꼈던 몇 가지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2,800권이 꽂힌 책장에 반짝 관심을 보인 아이들의 발길이 오래 머물렀다.
다섯 기의 비석을 따라가기 위한 첫 발길을 교현초등학교로 옮겼다.
그제 오후에 행정실로 전화를 했는데, 최종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교문에 있는 학교 보안관실에 근무자는 없고, 행정실로 전화를 했더니 정문에 얘기를 해두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없으면 그냥 들어오라는 덧말도 있었기에 조회대 옆에 있는 『감자꽃』을 찾았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고 있는 교정에 서서 비석에 새긴 『감자꽃』을 읽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띄어쓰기를 한 곳을 고려해서 다시 읽어 보라고 했다. 읽는 맛이 다름을 순간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교현초 운동장이 아이들의 매일 놀이터인데, 거기에 『감자꽃』 시비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다음 비석이 있는 곳은 권태응 선생의 묘소이다.
교현초에서 교현동을 지나, 연수동을 지나, 시청 앞을 지나, 쇠지울을 지나서 지난 1월에 걸었던 고라니 발자국이 쿡쿡 찍힌 지름길로 묘소에 닿았다. 가는 길에 시청 앞 공원에 있는 충주 도로원표에 잠깐 들러서 다른 지역과의 거리 측정의 기준이 되는 곳임을 이야기해주고 옹색해진 쇠지울에서 잠시 쉬면서 돌아온 오리떼가 헤엄하며 꽥꽥 질러대는 청 좋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토산이 형이 늘 걱정하던 벌초와 묘소 관리는 추석을 지나며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두 번째 비석에 새긴 감자꽃도 아이들에 읽혔다. 그리고 뒷면에 새긴 약력도 보면서 잠깐이지만 그의 삶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불편함은 여전했다.
고속철도가 새로 놓이며 능바우 건널목이 사라졌다. 건널목을 대신해 육교가 놓였는데,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사람이 지날 수 있다. 1월에 걸으며 충주읍성의 두께와 높이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1869년의 읍성 수개축 공사가 끝나고, 두께 10척이던 성벽이 25척이 되었고, 높이 8척이던 것이 20척이 되었다. 미안하게도 읍성이 있었던 성내동 공간에서는 그 두께와 높이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고 내리는 사이가 잠깐이지만 높이를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고, 올라서서 보이는 찻길이 두께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고속철이 개통되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육교에서 150년 전의 충주읍성 성벽을 체험하며 능바우를 지난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능바우에 있는 양정공(襄靖公) 권언(1421~1467)의 사우(사당)에 들러서 옻갓 마을과 능바우 마을을 중심으로 안동 권씨 집안이 자리잡게 된 내력을 살짝 일렀다.
벌써 12시가 되었다. 세 번째 비석까지 점심을 미끼로 아이들의 발길을 재촉했다.
한 녀석이 유독 뒤쳐졌는데, 다리가 아프단다. 마을창고 앞 비석이 있는 곳은 길 공사를 하는 중이라 먼지가 뽀얗다. 공사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아래를 가리고 있다. 다른 비석과 다른 시를 새긴 그것도 읽게 했다. ‘읍내댁, 청주댁, 서울댁과 한말댁, 북간도댁’까지 옛날 어머니들을 부르던 ‘집 이름’이 누구네 집이 아닌 것과 친정 동네 이름으로 불리던 옛 여인들의 삶을 설명해 줬지만, 뭔 말인지 이해했을까? 녀석들의 마음은 이미 점심 메뉴에 가 있었을지 모른다.
네 번째 비석은 생가터에 있다.
새로 생긴 한식뷔페에서 두 번씩 오가며 점심을 먹은 배부른 녀석들을 생가터라고 하여 커다란 비석을 세워둔 곳으로 이끌었다. 작년에는 그나마 드나들기에 넉넉했는데, 울타리 삼아 밭주인이 심어 놓은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입구 찾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키 자란 나무 때문에 비석도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윗밭의 농막에서 키우는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조용하더니, 나올 때 즈음에 낌새를 알아채고 컹컹 짖어댔다.
네 번째 비석은 뒷면에 악보를 새겼다.
악보를 따라 노래를 불러보려고 했더니, 제법 흉내를 낸다. 하지만 민요풍으로 작곡했다고 하지만, 우중충한 음조의 감자꽃은 영 어색했다. 그래서, ‘너희들 버전에 맞는 감자꽃을 한번 작곡해봐'라는 주문을 하고는 다섯 번째 비석을 향해 무술공원을 가로 질렀다. 그 사이 감자꽃을 랩 비슷하게 흥얼거리며 걷는다.
다섯 번째 바석은 탄금대에 있다.
꾀를 부리 듯 뒤처지기만 하는 머시매 둘을 앞장 세워 계단을 먼저 오르라고 했다. 조금 가는가 싶더니 뒤돌아보며 멋쩍어한다. 일행이 모두 눈에 들어온 걸 보더니, 계단을 오를 때는 펄펄 날아간다. 100개도 넘는 계단 끝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이 턱에 차올랐는데, 녀석들은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창얼대지는 않았지만, 내내 뒤처졌던 녀석들에게 내가 속았다는 걸 확신했다.
탄금대에 있는 감자꽃 노래비로 알려진 다섯 번째 비석은 새싹회에서 1967년에 기획하여, 1968년 5월 11일에 제막된 것이다. 당시 새싹회에서는 전국에 여섯 기의 비석을 세웠는데, 감자꽃이 첫 번째로 제막되었다. 이때 세운 노래비는 ▲ 박목월 작 <얼룩송아지>: 경주 황성공원, 5월 18일 제막, ▲ 윤극영 작 <반달>: 서울 삼청공원, 6월 25일 제막, ▲ 윤석중 작 <새나라의 어린이>: 서울 수표공원, 6월 25일 제막, ▲ 서덕출 작 <봄편지>: 울산 학성공원, 7월 1일 제막, ▲ 이원수 작 <고향의 봄>: 수원 팔달산, 7월 3일 제막 등이다.
‘어! 여긴 와 봤는데!’로 시작한 아이들의 반응은 한번 더 감자꽃 읽기로 하루 일정을 마쳤다. 하루 종일 따라 걸으며 다섯 기의 권태응 시비를 본 아이들에게는 뭐가 남았을까?
"토요일(11/16, 토)에 <충주 물길 따라가기>에 다섯 아이가 따라오는데, 오늘 주문한 <감자꽃> 동시집을 한 권씩 나눠줄 예정이다. 어제의 느낌과 여운이 식기 전에 말이다.
20241113 우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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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인 기자 다른기사보기